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 (문단 편집) === 브라질의 노예 해방과 공화정 수립 === 포르투갈이 운영하던 브라질 식민지는 원주민 인구 밀도도 적은데다가 종주국인 포르투갈이 인구가 부족하여 그 대안으로 흑인 노예를 대거 수입. 16~19세기 동안 미국으로 388,000명, 스페인어권 라틴아메리카로 250만여 명의 흑인 노예로 수입되는 동안 브라질에는 400만여 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가 수입되었다. 당시 브라질 플랜테이션의 노예 노동 환경은 무척 가혹하였는데 과로에 영양 불균형으로 브라질로 수입된 남성 노예들은 브라질에 도착한 이후 7~10년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들에게 소나 노새한테 사료를 주듯 [[콩밥]]만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포르투갈계 브라질인]] 농장주 상당수는 [[문맹]]이었는데, 이들은 책상에서 서류를 만지는 일은 유대인이나 하는 일이라 경멸해서, 흑인 노예 중에 글을 읽고 쓸 줄 알던 사람들에게 새로 포르투갈어를 배우게 한 후 일을 맡기는 편이었다. 이렇게 서기나 마름 일을 맡은 흑인들은 말레(Malê)라고 불렸으며 일정 수준 이상의 자유를 보장받고 가정을 이루고 재산을 모을 권리가 암묵적으로 승인되는 등 비교적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대개 [[풀라족]], [[하우사족]] 무슬림들로 포르투갈어 라틴 문자가 아니라 아랍 문자를 배워온 사람들이었지만, 아예 글을 읽고 쓴다는게 뭔지 아예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다른 언어로 글을 읽고 쓰던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편이 더 빨랐다.]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이후 [[브라질 독립 전쟁|전쟁이 발발하기도 했으며]], 1822년부로 [[브라질 제국]]이 되는 전후로 노예 무역이 영국에 의해 방해를 받자, 독립국 브라질은 1824년부로 [[독일계 브라질인|독일계 이민자]], [[이탈리아계 브라질인|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백인 인구 중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인구가 증가한 것을 계기로 말레들이 누리는 권리가 축소되었고, 말레들이 일으킨 봉기마저 진압당하며 이들 역시 브라질 내 여타 흑인 집단과 동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말레는 대개 무슬림이었으나 오늘날 브라질 흑인/파르도 인구 중 무슬림은 거의 없다.] 유럽계 이민자들이 유입된 지 약 반세기 이후 흑인 노예 플랜테이션이 발달했던 브라질 북동부 지역에 지역 약화와 가뭄이 겹쳐 1877~1878년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다. 기근으로 많은 농장들이 파산하고 노예 수십만이 명이 굶어죽거나 농장을 탈출하여 브라질 각지를 떠돌았다. 여기에 19세기 초반부터 유럽 각국이 하나둘 노예제를 폐지하기 시작했고 [[남북전쟁]]을 계기로 미국까지 노예제를 폐지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마지막까지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브라질 내에서도 점차 노예제 폐지 운동이 거세졌다. 개인적으로 선량한 성격인 황제 [[페드루 2세(브라질)|페드루 2세]] 역시 노예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황제의 딸이자 후계자인 [[이자베우]] 공주 역시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여기에 이 상황에서 영국이 브라질 측에 노예 무역을 포기하면 투자를 늘리겠다고 회유하자, 페드루 2세는 이자베우 공주의 주도 아래 1886년에는 사라이바 코테지피 법을 통해 60세 이상의 노예들을 해방하고 1888년에는 노예제를 완전 폐지하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노예 해방에 분노한 플랜테이션 노예주들이 공화정을 원하는 브라질 군부와 손을 잡고 188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폐지하고 [[브라질 제1공화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 공화국을 세운 농장주들은 노예제를 원복하는데 실패하였다. 애초에 맞기 싫어서 눈치보면서 일하는 노예 노동이 임금 노동자들로 운영되는 플랜테이션과는 절대 경쟁해서 이길 수 없었고, 화풀이로 황제를 내쫒는데 성공한 대농장주들도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역행할 수는 없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영국과 네덜란드가 운영하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 카리브해 식민지의 플랜테이션은 [[쿨리]] 노동력을 바탕으로 생산성이 대폭 개선되었는데, 브라질의 대농장들은 바로 이들과 경쟁해야 했다. 브라질의 농장주들도 질 수 없다며 유럽계/아시아계 임금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연유로 19세기부터 개발이 시작된 브라질 남부에는 기존의 흑인/파르도 인구 대신에 유럽계/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브라질 북부의 경우 무더운 날씨 때문에 유럽계나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 돈을 주고도 일을 시키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흑인 노예 노동력을 이용한 것도 있었지만 새로 개발되는 [[상파울루]]를 비롯한 남부는 온대기후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없었다. 브라질에서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던, 흑인 인구가 밀집한 북동부 지방은 황폐하고 낙후된 변방 지대로 전락하고,[* 19세기 중반 이후 브라질 북동부는 사탕수수 농사를 지으면 카리브해의 영국, 네덜란드 플랜테이션과 경쟁이 안 돼서, 대신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서만 재배 가능한(다시 말해서 해안 섬 지대에서 재배하기 힘든) 커피 농사에 집중하게 되었다.] 대신 해안 대도시 및 새로 개척된 남부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만연한 인종차별주의 사상(흑인은 우매하고 게으르다는 인식) 때문에 브라질 남부 개발에는 흑인이 사실상 배제되었고, 브라질의 흑인 노예 해방은 결국 미완의 개혁으로 남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